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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IT/Humanities

나의 쑥바구니는 어디에 있을까

나의 쑥바구니는 어디에 있을까

 

쑥 캐러 가자는 전화가 왔다. 낙동강 기슭 햇살이 그리 좋다는 것이다. 쑥이라니. 그 발음 속에서 명랑한 봄이 반짝 열렸다. 유년 시절 내 소유였던 쑥칼과 쑥바구니가 문득 떠올랐다.


글 김수우 시인 일러스트 김호식

 

 

 

 

 

공명을 잃어버린 어느 봄날
일곱 살 손녀 전용으로 외할아버지가 건네준 자그마한 둥구미와 손수 칼날을 잘라 만든 쑥칼. 동무가 내 이름을 부를라치면 들마루 귀퉁이에 놓인 쑥바구니를 들고 팔짝팔짝 뛰쳐나가곤 했다. 먹을 게 부족한 시절이었지만 모든 게 넉넉했다. 자연이 선생이었고 식구였고 어깨동무였다.
예나 지금이나 봄은 한결같은 차림으로 다가온다. 매화 그늘 사이로 천리향 향기가 번지나 했더니 목련이 팡팡 한참 터진다. 담방담방, 파닥파닥, 만물이 돌아오는 소리가 분주하다. 꽃 지는 소리, 새움 돋는 소리, 햇살이 그네 타는 소리, 바람이 뛰어가는 소리. 여기저기 웅성거림이 돋아난다. 그 리듬이 너무 아름다워 어떤 비천도, 어떤 죄인도 설레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쑥바구니를 들어본 지 수십 년. 그 설렘이 민망하다. 꽃눈들이 사방에서 터지는데 마음은 주눅이 든다. 현실을 둘러싼 곤경이 서러워진다. 폭력으로 얼룩져 있는 뉴스들 때문일까. 쉽게 회복되지 않는 경제 현실 때문일까. 그 막막함은 벚꽃이 지는 팽목항 깊은 바다를 닮았다. 물질은 풍요로운데 더 곤궁해지는 일상. 모든 관계에 어떤 공명을 잃어버린 지 너무 오래됐다. 정말 내 삶이, 우리 문명이 곤경에 처했음을 깨닫는 봄이다.

 

 

사물의 목소리로부터 얻은 자유
불편이 불편한 것인 줄 모르던 시절이 있었다. 가난이 가난인 줄 모르던 시절이 있었다. 그땐 배우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것들이 많았다. 쑥을 캐면서 나는 저절로 거대한 자연을 이해했다. 매일 토닥토닥 다투던 동무들. 아침이면 전날 다툼도 잊고 큰 목청으로 불러내어 어울렸다. 주변의 풍경은 늘 자애로웠다. 그 어느 것도 우리를 주눅 들게 하지 않았다. 그렇게 손톱 밑에 쑥물 들며 꿈꾸던 봄 하늘은 어디 갔을까.
소비문명의 극단, 불편한 것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 차를 탄 사람을 보면 걷는 것이 불편하고, 대형 쇼핑몰 앞에서 과일 좌판이 불편하고, 비싼 액세서리 앞에서 싸구려가 불편하다. 경쟁과 비교는 삶을 계속 불편하게 만든다. 별것 아닌 것에 쉽게 주눅 들거나 쉽게 뻔뻔해진다. 편리함과 안락에 길들여지면서 사소한 불편도 고통과 분노가 되고 있다. 미세한 불만들이 극단의 폭력이 돼도 아무도 제어할 수가 없다.
어쩌다 이렇게 많은 불편을 많이 알게 된 걸까. 조금 더 편리해지려는 욕망이 서로를 고독하게 한다. 불편을 느낀다는 것은 편리함에 길들여졌다는 말이다. 그 편리는 끊임없는 자기 합리화를 통해 말과 행위의 간극을 만들어내었다. 이 간극에서 우정과 연대를 잃어버리면서, 거기서 함께 잃어버린 것이 시(詩)다. 시를 잘 안 읽는(혹은 못 읽는) 시대가 된 까닭은 기실 사물의 목소리를 감지하는 능력을 잃어버린 탓이다. 이는 편리함만 추구해 온 탓이다. 보이는 물질에만 급급하니 사유는 저절로 타락했다. 
쑥바구니는 한 편의 시였음을 이제야 깨닫는다. 그때 우리는 사물의 목소리를 들었다. 

 

보이지 않는 세계를 감지하는 것, 들리지 않는 목소리를 듣는 것이 참된 생명력이다. 그것이 바로 우주적 존재로서의 자연인, 우리였다.

 

인간, 극복돼야 할 그 무엇
세계는 아름다운 신들로 가득하다. 하지만 이제 우린 신을 만날 능력을 잃어버렸다고 해야 할까. 우리는 굴참나무의 목소리를 들을 수가 없다. 매일 사용하는 밥그릇의 목소리도 들을 수 없다. 그렇게 사물도 우리도 서로 대상이 되고 만 것이다. 보이지 않는 세계를 감지하는 것, 들리지 않는 목소리를 듣는 것이 참된 생명력이다. 그것이 바로 우주적 존재로서의 자연인, 우리였다. 그러나 우린 그 자연으로부터 얼마나 멀리 온 것일까.
모든 사람은 자신의 능력만큼 신을 만난다고 한다. 스피노자의 금언이다. 신은 근원이다. 원래의 나, 원래의 우리, 원래의 자연, 원래의 우주를 어떻게 만날 수 있을까. 인공지능AI의 시대, 그 기대와 두려움, 그 교차로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타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그 목소리 속에 내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자신만의 근원적 존재감을 회복하기 위해 우리는 다시 쑥바구니가 필요하고 시가 절실하다. 삶을 회복하는 것이 봄이라면, 생명의 근원을 찾아나서는 일, 사물의 음성을 듣는 시적인 감수성이 우선인 것이다.

 

 

즐거운 불편을 선택하는 것
깨달음을 얻는 데는 곤이지지(困而知之)도 중요하다. 타고난 앎의 경지, 배움을 통해 아는 경지도 있지만, 곤경에 처해 고생고생 힘들여 깨닫는 곤이지지는 더 아름다운 경지다. 곤이지지는 생명을 감수하는 힘이며 실천하는 삶이며 투쟁하는 용기를 말한다. “인간은 극복돼야 할 그 무엇이다”라고 말한 니체의 극복하는 인간은 바로 곤이지지의 세계가 아닐까. 불편함을 통해 세계를 이해하고 가난을 통해 사람을 이해하고 고통을 통해 자신을 이해하는 것, 그것이 바로 자연이고 자유다.
내 쑥바구니는 어디다 두었을까. 아직 가슴 속 창고 어딘가에는 놓여 있을 것이다. 뽀오얀 먼지를 덮어쓴 채. 낙동강 강변으로 나가보아야겠다. 손톱 밑에 쑥물이 들어 돌아온다면 이 모든 곤경을 조금 헤어날 수 있을까. 우리를 불편하게 하는 그 모든 불편을 흔쾌히 누릴 수 있을까. 그제야 진정한 봄 속으로 들어갈 수 있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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